제1차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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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십자군은 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호소로 시작되어 1099년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마무리된 서유럽의 군사 원정이다. 11세기 유럽의 인구 증가와 교회의 권위 강화, 동서 교회의 분열 등의 배경 속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지원 요청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교황은 성지 탈환을 호소했고, 많은 이들이 참여하여 민중 십자군과 제후들의 십자군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십자군은 니케아 공방전, 도릴라에움 전투 등을 거쳐 안티오키아를 점령하고, 예루살렘 공방전을 통해 도시를 탈환했다. 이 과정에서 반유대주의적 폭력 사태가 발생했고, 십자군 국가들이 건설되었다. 제1차 십자군은 서유럽과 동방 세계 간의 교류에 영향을 미쳤으며, 다양한 역사적 기록과 연구가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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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십자군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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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분쟁 | 제1차 십자군 |
일부 | 십자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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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1096년 8월 15일 – 1099년 8월 12일 |
장소 | 레반트 및 아나톨리아 |
영토 | 십자군이 니케아를 함락시키고, 서부 아나톨리아 대부분을 비잔티움 제국에 반환하는 데 도움을 줌. 십자군이 성공적으로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십자군 국가를 세움. |
결과 | 십자군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레몽 4세의 군대 고드프루아 드 부용의 군대 로베르 쿠르토즈의 군대 로베르 2세 드 플랑드르의 군대 위그 드 베르망두아의 군대 보에몽 1세의 군대 민중 십자군 군대 비잔티움 제국 |
교전국 2 | 셀주크 제국 룸 토후국 다니슈멘드 왕조 파티마 왕조 |
지휘관 | |
지휘관 1 | 레몽 4세 아데마 드 퓌이 고드프루아 드 부용 보두앵 드 불로뉴 위그 드 베르망두아 스티븐 드 블루아 로베르 2세 드 플랑드르 로베르 쿠르토즈 페터 은둔자 보에몽 드 타란토 탕크레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 타티키오스 마누엘 부투미테스 |
지휘관 2 | 킬리지 아르슬란 야기 시얀 케르보가 두카크 리드완 토그테킨 자나흐 아드 다울라 이프티카르 알 다울라 알 아프달 샤한샤 |
병력 | |
병력 1 | 130,000명에서 160,000명으로 추정 80,000명에서 120,000명의 보병 17,000명에서 30,000명의 기사 |
병력 2 | 미상 |
사상자 | |
사상자 1 | 보통 또는 심각 (추정치 다양) |
사상자 2 | 매우 심각 |
2. 역사적 배경
7세기 이슬람교 창설 이후 기독교 국가와 이슬람 국가는 지속적인 갈등을 겪었다. 무함마드 사후 1세기 동안 이슬람 세력은 예루살렘을 비롯한 레반트,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11세기에 기독교도들은 레콩키스타를 통해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의 지배를 점차 되찾았지만, 성지와의 유대는 약화되었다.[8] 레반트 지역의 이슬람 당국은 기독교 신앙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종종 엄격하게 금지했다.
제1차 십자군은 파티마 왕조와 셀주크 투르크의 확장으로 인해 성지와 비잔티움 제국으로 이슬람이 확산됨에 대한 기독교 세계의 반응이었다. 서유럽에서는 예루살렘이 점점 회개를 위한 순례의 장소로 여겨졌다. 셀주크 투르크의 예루살렘 지배는 약했지만, 순례자들은 어려움과 기독교인에 대한 탄압을 보고했다. 비잔티움 제국의 군사적 지원 필요성은 서유럽 기사 계급의 교황 군사 지휘 수용 의지 증가와 맞물렸다.
카롤링거 왕조 붕괴 후 서유럽은 바이킹과 마자르인의 기독교화로 안정을 찾았다. 이 시기에 유럽은 중세 온난기로 접어들어 농업 생산력과 출산율이 증가했다. 인구 증가는 상인 계급의 증가, 신분 상승, 로마네스크 건축의 대성당과 신도시 건설, 변방으로의 이주와 개간, 성물 신앙과 성물 수집 열풍,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와 예루살렘 순례 등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에너지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일어난 레콩키스타와 같이 비가톨릭 신자들에게 향했다. 또한 이슬람교도와의 전투를 통한 전리품 획득, 약탈, 인신매매라는 경제적 목적도 있었다. 노르만인과 동방 정교도는 시칠리아 섬 지배를 놓고 다투었고, 피사, 제노바, 아라곤 등은 마요르카 섬과 사르데냐 섬에서 이슬람교도와 싸우며 이베리아 반도 연안 지역에서 이들을 몰아냈다.
1074년,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그리스도의 기사들"에게 동로마 제국 지원을 호소했지만, 동로마 제국 구원이라는 호소는 서유럽 사람들을 감동시키지 못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외친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목표는 군인뿐만 아니라 가톨릭 여러 국가의 광범위한 사람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불러일으켰다.
서유럽과 이슬람 국가들 사이에는 동로마 제국이 존재했다. 동로마 제국에는 정교회라는 별개의 교파가 존재하여 가톨릭 교회와 북지중해 연안의 옛 로마 제국 지배 지역을 양분하고 있었다.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누스 시대에 제국은 서쪽으로는 가톨릭 국가, 동쪽으로는 이슬람 세계와 접하고 있었다. 알렉시오스 1세는 이슬람교도들에게 빼앗긴 아나톨리아 반도 탈환을 염원하고 있었다.
당시 이슬람 국가들은 서로 다투고 있었고, 셀주크는 내분 상태였던 것이 제1차 십자군의 행동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술탄 알프 아르슬란은 1071년에 동로마 제국군을 격파하고 아나톨리아를 지배했지만, 1092년에 말리크 샤가 죽자 대셀주크 제국은 내분이 계속되어 분열 상태에 있었다. 아나톨리아 지역은 룸 셀주크 제국이, 시리아는 시리아 셀주크 제국이 통치했고, 이들은 심각한 대립 상태에 있었다.
자지라와 팔레스타인은 명목상 셀주크 제국의 영토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셀주크 가문의 일족들에 의해 여러 개로 나뉘어 지배되고 있었다. 팔레스타인은 파티마 왕조가 통치하고 있었고, 파티마 왕조는 셀주크 제국에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빼앗긴 이후로 계속 다투고 있었다. 알렉시오스 황제는 십자군에게 예루살렘 공격에 있어 파티마 왕조와 손을 잡도록 권고하고 있었다.
무스타알리가 이끌던 파티마 왕조는 1076년에 예루살렘을 빼앗겼고, 십자군이 도착하기 직전인 1098년에 간신히 되찾았을 뿐이었다. 파티마 왕조는 십자군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고,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직전까지 셀주크 제국 자체를 공격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십자군이 일부 기사들에 대한 호소였지만, 곧 막대한 인원을 동원하여 이민 활동과 같은 양상을 띠게 되었다. 동방의 비잔티움 제국과 이슬람 국가들의 발달된 문화와 부는 서구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하급 기사들은 봉건 제도의 빈곤에서 벗어나고자 했고, 농민과 장인들도 가난하고 고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서유럽 중세 기독교도의 두 가지 삶의 방식, 즉 성스러운 전사와 순례자가 하나로 결합된 것이다. 전투에 참가한 자에게 면죄가 주어지거나, 전투에서 죽은 자가 순교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십자군 운동에서 처음으로 생겨난 개념이었다.
2. 1. 유럽의 상황
11세기 유럽은 기술 및 농업 혁신으로 무역이 번창하면서 인구가 크게 증가했다. 사회는 영주제와 봉건제를 기반으로 조직되었고, 가톨릭교회는 서구 문명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1]1050년부터 1080년까지 그레고리오 개혁 운동은 교황의 권위를 강화하려 했고, 이는 교황의 최고 권위 교리에 뿌리를 둔 동방 교회와의 갈등을 초래했다. 1054년 교황 레오 9세는 미카엘 1세 케룰라리우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에게 사절단을 파견했으나, 이는 상호 파문과 동서 분열로 이어졌다.[2]
초기 기독교인들은 공동체 목적을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에 익숙했으며,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전의 교리를 발전시켰다. 그는 공격적인 전쟁은 죄악이지만, 합법적인 권위에 의해 선포되었거나, 방어적이거나, 토지 회복을 위한 것이며, 과도한 폭력을 수반하지 않는 경우 전쟁은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서유럽에서는 카롤링거 제국 붕괴 이후 전사 계급 간의 폭력이 만연했고, 교황청은 이를 완화하려 노력했다.
교황 알렉산더 2세는 군사 자원을 위한 선서를 통해 모병 시스템을 개발했고,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이를 유럽 전역으로 확장했다. 루카의 안셀무스는 정당한 목적을 위해 싸우는 것이 죄 사함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며 십자군 사상으로 발전하는 중요한 단계를 밟았다.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왕국들은 1031년 코르도바 칼리파국이 붕괴되면서 ''레콩키스타''로 알려진 영토 확장의 기회를 얻었다. 1063년 바르바스트로 공성전은 알렉산더 2세의 지지를 받았으며, 제1차 십자군 직전 우르바누스 2세는 이베리아 기독교인들에게 타라고나 점령을 격려했다.[7]
이탈리아 노르만인들은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를 장악하며 교황청과 대립했고, 1059년 무슬림 시칠리아를 침략했을 때는 교황의 깃발 아래에서 전투를 벌였다. 로베르 기스카르는 1071년 바리를 함락시켰고, 1081년과 1085년에는 아드리아 해 연안의 디라키움 주변에서 전투를 벌였다.
2. 2. 이베리아 반도와 이탈리아의 상황
카롤링거 왕조 붕괴 후 서유럽의 가톨릭권은 안정을 찾았지만, 그 에너지는 비가톨릭 신자들에게 향하게 되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레콩키스타가 일어났고, 이슬람교도와의 전투를 통해 전리품 획득, 약탈, 인신매매라는 경제적 목적을 추구했다. 노르만인과 동방 정교도는 시칠리아 섬 지배를 놓고 다투었고, 피사, 제노바, 아라곤 등은 마요르카 섬과 사르데냐 섬에서 이슬람교도와 싸우며 이베리아 반도 연안 지역에서 이들을 몰아냈다.[1]2. 3. 동방의 상황
비잔티움 제국은 건국 이후 부, 문화, 군사력의 중심지였다.[3] 바실리우스 2세 치하에서 제국의 영토는 1025년에 최대치에 달했다. 제국의 국경은 동쪽으로 이란까지 뻗어 있었고, 불가리아와 이탈리아의 대부분을 지배했으며, 지중해의 해적 행위는 진압되었다. 제국의 이슬람 이웃들과의 관계는 슬라브족이나 서방 기독교인들과의 관계보다 더 다투지 않았다. 이탈리아의 노르만인, 북쪽의 페체네그족, 세르비아인, 쿠만족, 그리고 동쪽의 셀주크 투르크인들은 모두 제국과 경쟁했으며, 이러한 도전에 맞서 황제들은 심지어 적들로부터 용병을 고용하기도 했다.[3]7세기 이슬람교 성립 이후 이슬람 세계 또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4] 9세기부터 중동으로 유입된 초기 투르크계 이주민들은 아랍과 투르크 역사를 뒤섞었다. 서아시아의 현상 유지는 특히 10세기 셀주크 투르크인의 도래로 인해 후속 투르크 이주민들에 의해 도전받았다. 이들은 트란스옥사니아 출신의 소규모 지배 씨족이었다. 그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이란으로 이주하여 재산을 모았다. 이후 20년 동안 그들은 이란, 이라크, 근동을 정복했다. 셀주크인들과 그 추종자들은 수니파 무슬림이었고, 이는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에서 시아파 파티마 칼리파국과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1092년부터 셀주크 제국의 실질적인 통치자 니잠 알 멀크의 죽음 이후 중동의 현상 유지는 붕괴되었다. 이는 셀주크 술탄 말리크 샤와 파티마 칼리프 알 무스타시르 빌랄라의 죽음과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혼란과 분열에 시달리던 이슬람 세계는 그 너머의 세계를 무시했기 때문에 제1차 십자군 원정이 도착했을 때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말리크 샤는 아나톨리아 룸 술탄국에서는 킬리치 아르슬란에게, 시리아에서는 그의 형제 투투시 1세에게 왕위를 계승했고, 투투시는 스스로 술탄이 되기 위해 베르키야루크와 내전을 시작했다. 1095년 투투시가 죽자 그의 아들들인 리드완과 두칵이 각각 알레포와 다마스쿠스를 상속받아 시리아를 서로 적대적인 여러 에미르들에게 분할했고, 케르보가, 모술의 아타벡도 마찬가지였다.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의 대부분은 파티마 왕조가 지배했다. 칼리프 알 무스타알리의 명목상 통치하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베지르 알 아프달 샤한샤가 통치하던 파티마 왕조는 1073년 셀주크인들에게 예루살렘을 빼앗겼지만, 십자군이 도착하기 직전인 1098년 셀주크와 연관된 소규모 투르크 부족인 아르투크인으로부터 그 도시를 재탈환하는 데 성공했다.[8]
2. 4. 기독교인 박해
역사학자 조나단 라일리-스미스(Jonathan Riley-Smith)와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는 성지의 무슬림 당국이 종종 "기독교 신앙의 공개적인 표현"에 대해 가혹한 규칙을 시행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8]1026년에는 생트반의 리처드가 미사를 드리는 모습이 목격된 후 돌에 맞아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무슬림 관리들은 기독교 순례자들에 대한 약탈과 학살을 묵인했다는 주장도 있다. 1064년에는 무슬림들이 독일 주교 4명과 수천 명의 순례자들을 매복 공격하여 3분의 2를 학살한 사건이 발생했다는 기록도 있다.[12]
기독교 박해는 셀주크 투르크의 침입 이후 더욱 악화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투르크가 점령한 마을들은 기독교 순례자들에게 통행세를 부과했으며, 셀주크는 순례자들의 예루살렘 접근을 허용했지만, 종종 막대한 관세를 부과하고 지역 공격을 묵인했다는 것이다. 많은 순례자들이 납치되어 노예로 팔렸고, 다른 순례자들은 고문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소식은 서유럽의 기독교인들에게 전해져 분노를 일으켰다고 한다.[12]
3. 클레르몽 공의회
1095년 3월, 알렉시오스 1세는 피아첸차 공의회에 특사를 파견하여 당시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셀주크 왕조와의 전쟁 지원을 요청했다. 우르바누스 2세는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18] 가톨릭교회 측에서는 항상 정교회가 자신에게 복종하는 형태를 원하고 있었고, 교황은 이것이 정교회와의 불행한 결별을 극복하고 로마 교황 아래 통합되는 형태의 교회 재통합의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우르바누스 2세는 1095년 봄부터 여름에 걸쳐 6개월 이상 프랑스 중남부를 순회하며 동방으로 군대를 파견할 계획을 세웠다.
1095년 11월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열린 교회 회의에서 교황은 중대한 발표를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발표 당일, 참석한 프랑스 귀족들과 성직자들에게 교황은 이슬람교도의 손에서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자고 호소했다. 그는 인구가 과잉된 프랑스인들에게 성지야말로 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주장하며, 이 행동에 참여하는 자들에게는 지상에서나 천상에서나 보상이 주어지고, 군사 행동 중에 목숨을 잃더라도 면죄가 주어질 것이라고 알렸다. 이 호소에 참석한 군중의 열기는 고조되어 "신의 뜻대로!"라는 외침이 울려 퍼졌다.[20][24]
우르바누스 2세의 십자군 선동 설교는 유럽 역사에 남는 명연설 중 하나로 여겨지지만, 제1차 십자군의 성공 후에 기록이 작성되었기 때문에, 실제로 교황이 무엇을 말했는지는 현대에는 알기 어렵다. 다만 하나 분명한 것은 교황의 호소가 군중의 열광을 불러일으켰고, 교황의 의도를 넘어서는 규모의 반향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교황은 1095년부터 1096년에 걸쳐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등 각지의 주교들에게 같은 내용의 호소를 하게 했다.[22]
그때, 이 행동에는 여성, 수도사, 병자는 참여할 수 없다고 덧붙였지만, 열광하는 집단의 귀에는 전달되지 않았다. 이 호소는 농민과 농노도 열광시켰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갈 만한 준비도 전투 기술도 없었지만, 일상의 억압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종교적 열정에 몸을 불태우고, 앞선 동방 문명에서의 부귀를 바랐기 때문에,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교회 지도자나 영주들이 아무리 엄격하게 금지해도, 열광적인 서민들이 성지로 향해 집단 이동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4. 민중 십자군
1096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 우르바누스 2세가 계획한 십자군 원정이 시작될 예정이었으나, 그보다 몇 달 전 아미앵 출신의 수도자 은둔자 피에르를 지도자로 삼은 가난한 농민과 하급 기사들이 먼저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이들을 "'''민중십자군'''"이라고 부른다.[27]
피에르는 우르바누스 2세의 메시지를 전파한 설교가들 중 가장 성공적이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대부분 훈련받지 않고 글을 모르는 농민들이었지만, 발터 상사부아르를 포함한 많은 기사들도 참여했다.[27] 민중십자군은 10만 명에 달했지만, 대부분 전투 기술이 없었고 어린이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민중십자군은 다뉴브 강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헝가리, 불가리아, 동로마 제국 영토에서 약탈과 폭력을 일삼았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8월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다.[41]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도 문제를 일으킨 민중십자군은 알렉시오스 1세 황제에 의해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소아시아로 보내졌다.
룸 셀주크 왕조 영토에 들어간 민중십자군은 니케아 주변을 약탈하다가 킬리치 아르슬란 1세가 이끄는 튀르크 군대에 의해 대부분 학살당했다(키보토스 전투).[26] 시베토 전투에서 튀르크 궁수들은 십자군 군대를 궤멸시켰고, 발터는 전사했다. 피에르는 살아남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 나중에 제1차 십자군 본대에 합류했다.
4. 1. 반유대주의와의 연관성
제1차 십자군 운동의 확산은 유럽 내 반유대주의 정서를 고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096년, 제1차 십자군 설교는 라인란트 학살 등 유대인에 대한 폭력 사태를 유발했다. 에미호(때로는 라이닝겐의 에미호로 잘못 알려짐)는 슈파이어와 웜스의 유대인들을 공격했고, 다른 비공식 십자군들은 마인츠 유대인 공동체를 파괴했다.[26] 마인츠에서는 한 유대인 여성이 십자군에게 아이들을 죽게 하느니 차라리 자신이 아이들을 죽였고, 수석 랍비 칼로뉴무스 벤 메슐람은 살해당할 것을 예상하고 자살했다는 기록이 있다.[26] 에미호의 부대는 쾰른으로 이동했고, 다른 부대는 트리어, 메츠 및 다른 도시들로 향했다.[26]이러한 공격의 배경에는 유대인과 무슬림이 모두 그리스도의 적이며, 따라서 싸우거나 기독교로 개종시켜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다.[26] 교회 지도부는 유대인에 대한 폭력을 공식적으로 지지하지 않았고, 쾰른 대주교를 비롯한 기독교 주교들은 유대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26] 슈파이어 주교는 10년 전 유대인들에게 성벽으로 둘러싸인 게토를 제공하고, 수석 랍비에게 사법 문제 통제 권한을 부여하기도 했다.[26]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는 보호의 대가로 돈을 받기도 했다.[26]

그리고 이를 기뻐하며 공과 신에게 감사하는 유대인들 (1096년)
1096년의 사건을 피해 독일의 유대인들은 종교적으로 관용적인 폴란드 왕국으로 피난했다. 당시 폴란드 군주 브와디스와프 1세 헬만과 그의 아들 보레스와프 3세 크시보우스티는 그들을 따뜻하게 맞이했다. 폴란드는 1264년 칼리시시에서 "칼리시 법령"을 공포하여 유대인의 권리와 안전을 제도적으로 보장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폴란드는 중세부터 제2차 세계 대전 시대까지 유럽에서 가장 많은 유대인 인구를 가진 국가(지역)였다.
5. 제후들의 십자군
1096년 여름, 귀족과 제후들이 주도한 십자군 본대가 유럽 각지에서 성지로 향했다. 이들은 교황 사절 아데마르 드 몽테이유, 툴루즈 백작 레이몽 4세, 보에몽을 중심으로 결집했다. 로렌 출신 고드프루아 드 부용과 그의 형제들, 로베르 2세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2세 (노르망디 공), 블루아 백작 에티엔 2세, 필리프 1세의 동생 위그 드 베르망드와 등 쟁쟁한 인물들이 참여했다.
5. 1. 모집

유럽 전역에서 대규모 십자군 모집이 이루어졌다. 클레르몽 공의회 다음 해인 1096년, 서유럽을 떠난 십자군 병력은 7만 명에서 8만 명으로 추산되며, 3년간의 원정 기간 동안 더 많은 병사들이 합류했다.[29] 기사는 7,000명에서 1만 명, 보병은 3만 5,000명에서 5만 명으로 추산되며, 비전투원을 포함하면 총 6만 명에서 10만 명에 달했다. 우르바노 2세의 연설은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었다. 그는 르 퓌의 아데마르[30]와 툴루즈 백작 레이몽 4세[31]와 십자군에 대해 논의했고, 즉시 남부 프랑스의 가장 중요한 두 지도자의 지지를 얻었다. 아데마르 자신도 공의회에 참석했으며, "십자가를 택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1095년 말부터 1096년까지 우르바노 2세는 프랑스 전역에 십자군 참여를 호소하는 메시지를 전파하고, 주교들과 사절들에게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다른 교구에서 설교할 것을 촉구했다.
교황과 알렉시오스 1세의 예상과 달리, 연설에 대한 반응은 매우 컸다. 프랑스 순회 중 우르바노 2세는 여성, 수도승, 병자 등 특정 사람들의 십자군 참여를 금지하려 했지만, 이는 거의 불가능했다. 결국 십자군에 참여한 대부분은 기사가 아니라 부유하지 않고 전투 기술이 부족한 농민들이었으며, 이들은 교회와 세속 귀족들이 쉽게 통제할 수 없는 새로운 감정적이고 개인적인 경건함을 보여주었다. 일반적으로 설교가 끝나면 모든 자원자는 성묘 교회 순례를 완료하겠다는 서약을 했고, 보통 옷에 십자가를 꿰매어 받았다.
역사적 기록이 없는 수천 명의 참가자들의 동기나, 수도사나 성직자들이 재구성한 주요 기사들의 동기를 평가하기는 어렵다. 많은 십자군에게 개인적인 경건이 주요 요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대중적 열의에도 불구하고 우르바노 2세는 프랑스 귀족 출신의 기사 군대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아데마르와 레이몽 외에도 1096년 내내 그가 모집한 다른 지도자들로는 개혁파 교황의 남부 이탈리아 동맹국인 타란토의 보에몽[32], 보에몽의 조카 갈릴래아 공작 탕크레드[33], 이전에 신성 로마 제국의 반개혁 동맹국이었던 부용의 고드프루아[34], 그의 형제 부로뉴의 발두인[35], 파문당한 프랑스의 필리프 1세의 형제인 베르망두아 백작 위그 1세[36], 잉글랜드의 윌리엄 2세의 형제인 로베르 꾸르토즈[37], 그리고 그의 친척인 블루아 백작 스테판 2세[38]와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2세[39]가 있었다. 십자군은 북부와 남부 프랑스, 플랑드르, 독일, 남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네 개의 별개 군대로 나뉘었으며, 항상 협조적이지는 않았지만 공통의 목표로 결속되었다.
십자군은 프랑스의 가장 강력한 귀족들 중 일부가 이끌었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떠났으며, 종종 온 가족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십자군에 참여했다. 예를 들어, 노르망디의 로베르는 노르망디 공국을 그의 형제 잉글랜드의 윌리엄 2세에게 맡겼고, 고드프루아는 그의 재산을 교회에 매각하거나 저당 잡혔다. 탕크레드는 기사 전쟁의 죄악된 본성에 대해 걱정했고, 폭력에 대한 거룩한 배출구를 찾게 되어 기뻤다. 탕크레드와 보에몽뿐만 아니라 고드프루아, 발두인, 그리고 그들의 형제인 부로뉴 백작 외스타슈 3세[40]는 함께 십자군에 참여한 가족의 예이다. 십자군에 대한 열의는 대부분 프랑스 십자군이 먼 친척이었기 때문에 가족 관계에 기반을 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에몽처럼 개인적인 발전을 위해 십자군에 참여한 경우도 있었다. 보에몽은 동쪽에 자신의 영토를 개척하고자 하는 욕망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았으며, 이를 위해 이전에 비잔티움 제국과 싸운 적이 있었다. 십자군은 그에게 또 다른 기회를 주었고, 그는 안티오키아 공성전 후에 도시를 점령하고 안티오키아 공국을 세웠다.
5. 2. 콘스탄티노플로 가는 길
십자군 군대는 여러 경로를 통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동했다. 고드프루아는 발칸 반도를 육로로 통과했고,[41] 툴루즈의 레이몽은 프로방스 군대를 일리리아 해안을 따라 이동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동쪽으로 향했다.[42] 보에몽과 탕크레드는 노르만 군대를 배편으로 두라조까지 이동시킨 후, 육로로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43] 이들은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을 때 식량이 부족하여 알렉시오스 1세에게 보급과 지원을 기대했다. 그러나 알렉시오스는 민중 십자군 당시의 경험과, 여러 차례 비잔티움 영토를 침략했던 숙적 보에몽이 십자군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 때문에 이들을 의심했다. 또한 십자군이 도시 외곽에 진을 치고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알렉시오스가 십자군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하여 이동 중 폭력 사건은 이전보다 적었다.[44]
십자군은 알렉시오스가 자신들의 지도자가 되기를 기대했을 수도 있지만, 알렉시오스는 그들과 합류할 의향이 없었고, 가능한 한 빨리 그들을 소아시아로 수송하는 데만 관심을 가졌다. 알렉시오스는 식량과 보급품을 제공하는 대가로 십자군 지도자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터키로부터 탈환한 모든 땅을 비잔티움 제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고드프루아가 가장 먼저 맹세했고, 다른 지도자들 대부분도 그 뒤를 따랐다. 다만, 십자군과 시민들 사이에 보급품 약탈 문제로 충돌이 발생하여 도시 안에서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에야 맹세가 이루어졌다. 레이몽만이 유일하게 맹세를 피하고, 제국에 해를 끼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알렉시오스는 십자군에게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기 전, 곧 마주하게 될 셀주크 군대에 대처하는 최선의 방법에 대해 조언했다.[45]
6. 니케아 공방전
1097년 상반기, 십자군 군대는 소아시아로 진입하여 페테르 선교사와 그의 소규모 군대의 잔존 병력과 합류했다. 알렉시오스 1세는 마누엘 부투미테스와 타티키오스 두 장군을 십자군 지원을 위해 파견했다. 십자군의 첫 번째 목표는 니케아였는데, 이 도시는 한때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킬리지 아르슬란 1세 치하 룸 술탄국의 수도가 되었다.[44] 당시 아르슬란은 중앙 아나톨리아에서 다니슈멘드와의 전투에 참여하고 있었고, 국고와 가족을 남겨둔 채 새로운 십자군의 힘을 과소평가했다.
1097년 5월 14일, 십자군이 도착하자 도시는 포위 공격을 받았다. 아르슬란은 이 소식을 듣고 니케아로 서둘러 돌아와 5월 16일 십자군을 공격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십자군의 규모에 격퇴되었고, 양측 모두 큰 손실을 입었다. 십자군은 도시가 위치한 이즈니크 호를 봉쇄할 수 없어 보급을 받지 못했기에 포위 공격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알렉시오스 1세는 도시를 함락시키기 위해 십자군의 함선을 통나무 위로 육로로 이동시켰고, 이 광경을 본 터키 수비대는 6월 18일 항복했다.[45]
도시 약탈을 금지당한 프랑크족 사이에서는 불만이 있었다. 알렉시오스 1세는 십자군에게 재정적 보상을 함으로써 이 불만을 다소 완화했다. 블루아의 스티븐은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시점에도 여전히 호의와 협력이 지속되었음을 확인했다.[45] 니케아 함락은 십자군과 비잔티움 제국 사이의 긴밀한 협력의 드문 결과로 여겨진다.
7. 도릴라에움 전투
1097년 6월 말, 십자군은 아나톨리아를 가로질러 행군했다. 이들은 비잔티움 제국 군대의 일부와 동행했으며, 알렉시오스 황제가 곧 비잔티움 군대 전체를 파병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십자군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 관리했는데, 하나는 노르만족이, 다른 하나는 프랑스인이 이끌었다. 두 그룹은 도리라에움에서 다시 만나기로 계획했지만, 1097년 7월 1일 프랑스군보다 앞서 행군하던 노르만족은 킬리치 아르슬란 1세의 공격을 받았다.[46] 킬리치 아르슬란 1세는 니케아에서 패배한 후 이전보다 훨씬 더 큰 군대를 모아, 빠른 기동력을 가진 기병궁수들로 노르만족을 포위했다. 노르만족은 "밀집된 방어 진형을 구축하여" 장비와 비전투원들을 보호하고, 다른 그룹에 도움을 요청했다. 프랑스군이 도착했을 때, 고드프리는 투르크군의 전열을 돌파했고, 교황 특사 아데마르는 후방에서 투르크군의 측면을 공격했다. 투르크군은 노르만족을 섬멸할 것으로 예상했고 프랑스군의 빠른 도착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연합된 십자군과 맞서 싸우기보다는 도망쳤다.
이후 십자군의 아나톨리아 행군은 저항 없이 진행되었지만, 킬리치 아르슬란 1세가 퇴각 과정에서 모든 것을 불태우고 파괴했기 때문에 여정은 고통스러웠다. 한여름이었고, 십자군은 식량과 물이 매우 부족했으며, 많은 병사와 말이 죽었다.
8. 아르메니아 소(小) 간주곡(Interlude)
킬리키아 문을 통과한 후, 보두앵과 탕크레드는 군대의 주력 부대에서 떨어져 아르메니아 지역으로 향했다.[48] 보두앵은 성지에 자신의 영지를 건설하고자 했으며, 아르메니아에서는 바그라트라는 모험가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었다. 보두앵과 탕크레드는 두 개의 별개 부대를 이끌고 9월 15일에 헤라클레아를 출발했다. 탕크레드는 먼저 타르수스에 도착하여 셀주크 수비대를 설득하여 성채에 자신의 깃발을 올렸다. 보두앵은 다음 날 타르수스에 도착했고, 반전으로 터키인들은 보두앵이 두 개의 탑을 점령하도록 허락했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탕크레드는 도시를 위해 싸우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 직후, 노르망디 기사단이 도착했지만, 보두앵은 그들의 입성을 거부했다. 밤 동안 터키인들은 노르망디 기사들을 학살했고, 보두앵의 부하들은 그들의 운명에 대해 그를 비난하며 남은 셀주크 수비대를 학살했다. 보두앵은 탑에 피신하여 자신의 결백을 부하들에게 설득했다. 해적 선장 부용의 기네메르는 베르단 강을 타고 타르수스로 항해하여 보두앵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보두앵은 기네메르의 부하들을 고용하여 그가 자신의 원정을 계속하는 동안 도시를 수비하게 했다.
한편 탕크레드는 마미스트라 마을을 점령했다. 보두앵은 9월 30일경 그 마을에 도착했다. 노르망디인 살레르노의 리처드는 타르수스에 대한 복수를 원하여 보두앵과 탕크레드의 군인들 사이에 소규모 충돌을 일으켰다. 보두앵은 마미스트라를 떠나 마라쉬에서 주력군에 합류했지만, 바그라트는 그에게 아르메니아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을 횡단하는 원정을 시작하도록 설득했고, 그는 10월 17일에 주력군을 떠났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보두앵을 환영했고, 지역 주민들은 셀주크인들을 학살하고 1097년 말 이전에 라벤델과 투르베셀 요새를 점령했다. 보두앵은 바그라트를 라벤델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1098년 초, 아르메니아 영주 에데사의 토로는 인근 셀주크인들에 맞서 도움을 요청하며 보두앵에게 사절을 보냈다.[49] 에데사로 출발하기 전, 보두앵은 셀주크인들과의 공모 혐의로 바그라트를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바그라트는 고문을 받고 라벤델을 항복하도록 강요받았다. 보두앵은 2월 초에 에데사로 떠났는데, 가는 길에 사모사타의 에미르 발둑의 군대에 의해 괴롭힘을 당했다. 도시에 도착하자 그는 토로와 현지 기독교 주민 모두에게 잘 받아들여졌다. 놀랍게도 토로는 보두앵을 아들로 입양하여 에데사의 공동 섭정으로 삼았다. 에데사 출신 군대에 의해 강화된 보두앵은 발둑의 영토를 습격하고 사모사타 근처의 작은 요새에 수비대를 배치했다.[50]
보두앵이 원정에서 돌아온 직후, 지역 귀족들은 보두앵의 동의 하에 토로에 반대하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폭동이 도시에서 발생하여 토로는 성채로 피신해야 했다. 보두앵은 양부를 구할 것을 약속했지만, 3월 9일 폭도들이 성채에 침입하여 토로와 그의 아내를 살해했을 때, 그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시민들이 보두앵을 통치자로 인정하자 그는 에데사 백작의 칭호를 취했고, 그리하여 최초의 십자군 국가를 건설했다.
비잔티움 제국은 1087년에 셀주크인들에게 에데사를 잃었지만, 황제는 보두앵에게 도시를 넘겨줄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게다가 라벤델, 투르베셀, 에데사의 획득은 나중에 안티오크에서 주력 십자군의 입지를 강화시켰다.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있는 땅은 십자군에게 식량을 공급했고, 요새들은 셀주크군의 이동을 방해했다.
9. 안티오키아 공방전
십자군 본대는 1097년 10월 안티오키아에 도착하여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안티오키아는 서쪽은 오론테스 강, 동쪽은 산으로 이어지는 어려운 지형에 위치하여, 수비병은 적었지만 많은 감시탑과 견고한 성벽을 가지고 있어 함락이 쉽지 않았다.
영주 야기 시야안과 그의 아들 샴스 알 다울라는 도시를 용감하게 지켰지만, 포위된 상황을 타개하지 못했다. 주변 봉신들은 도움 요청에 응하지 않았고, 1098년 5월 모술의 아타베크 켈보가가 군대를 이끌고 왔지만, 도중에 에데사 공격에 머무르며 안티오키아에 도착하지 못했다. 보에몽은 켈보가가 도착하기 전에 함락을 서두르기 위해 아르메니아인 경비병을 매수하여 성문을 열게 했다. 6월 3일, 십자군은 성내로 진입하여 불을 지르고 많은 시민들을 학살했다. 야기 시야안은 탈출하다 죽었고, 그의 아들 샴스는 요새에서 계속 싸웠다.[53]
며칠 후 켈보가의 원군이 도착하여 십자군은 역으로 포위되었지만, 켈보가 군대의 사기는 낮았다. 이때, 수도사 페트루스 바르톨로메오가 성창을 발견했다고 주장했고, 많은 병사들이 이를 승리의 전조로 믿었다. 십자군 병사들의 사기는 높아졌고, 6월 28일에 성 밖으로 나섰다. 켈보가는 십자군을 일거에 제압하려 했으나, 연합군은 붕괴되었다. 켈보가는 전투 없이 후퇴했고, 십자군은 추격하여 승리했다.
보에몽은 황제 알렉시오스가 십자군을 지원하지 않았으므로 맹세는 무효라고 주장하며 안티오키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했다. 십자군 지도부는 혼란에 빠졌고, 전염병까지 발생하여 많은 병사와 말이 목숨을 잃었다. 봉신들은 여름 행군을 피해 겨울을 기다렸지만, 군대는 통일된 지휘 체계를 잃었고, 주민들은 약탈에 저항했다. 1098년 말 마아랏 알 누만 포위전에서는 십자군 병사들이 인육을 먹는 사건도 발생했다. 1099년 1월, 툴루즈 백작 레이몽을 중심으로 지휘 체계가 회복되었고, 보에몽을 안티오키아에 남겨둔 채 군대는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보에몽은 안티오키아 공국을 건국하고 안티오키아 공 보에몽 1세가 되었다.
10. 안티오키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십자군은 지중해 연안을 따라 진군하면서 현지 통치자들과 평화 협정을 맺거나 전투를 벌였다. 1099년 초, 툴루즈의 레이몽 4세는 마알라트 누만의 성벽을 허물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로베르트 쿠르토즈와 탕크레드가 그 뒤를 따랐다.[58]
레이몽은 트리폴리를 점령하려 했지만, 먼저 1099년 2월 14일 레바논 북부 도시 아르카 공성전을 시작했다. 고드프리, 플랑드르의 로베르 2세, 탕크레드, 베아른의 가스통 4세가 3월에 아르카에 도착했지만, 공성전은 5월 13일까지 계속되었고, 십자군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철수했다.[58][59] 이 과정에서 쇼케의 아르눌프는 바르톨로메오에게 화형을 통한 신의 심판을 제안했고, 바르톨로메오는 며칠 동안 고통받다가 죽었다. 이는 성창이 위조품이라는 것을 보여주었고, 레이몽의 권위를 약화시켰다.[59]
셀주크 제국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한 파티마 왕조는 십자군에게 성지 순례자들의 자유로운 통행을 보장하는 대신 십자군이 그들의 영토로 진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협상을 시도했지만, 십자군은 이를 거부했다. 5월 13일, 십자군은 트리폴리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에미르 잘랄 알-물크 아부 엘-하산은 십자군에게 말을 제공하고 십자군이 파티마 왕조를 물리치면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맹세했다. 십자군은 5월 19일에 베이루트를, 5월 23일에 티르를 지났다. 6월 3일 야파에서 내륙으로 향한 십자군은 람라에 도착하여 람라-리다 주교구를 설립했다. 6월 6일, 고드프리는 탕크레드와 가스통을 보내 베들레헴을 점령하게 했고, 탕크레드는 베들레헴 성당에 자신의 깃발을 꽂았다. 6월 7일,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도착했다.[60]
11. 예루살렘 공방전
1099년 6월 7일, 십자군은 물과 식량이 부족하고 메마른 땅인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병력, 보급품, 시간도 부족했던 십자군은 도시를 포위하는 대신 공격하여 함락하기로 결정했다.[61] 당시 십자군 병력은 기병 1,500명을 포함하여 약 12,000명으로 추산된다.[62]
최초 공격 실패 후, 십자군 지도자들은 회의를 통해 조직적인 공격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1099년 6월 17일, 구글리엘모 엠브리아코가 이끄는 제노바 선원들이 야파에 도착하여 십자군에게 숙련된 기술자들과 공성 무기 건설에 필요한 목재를 제공했다.[63] 사제 피터 데시데리우스는 르 퓌의 아데마르의 계시를 받았다며, 금식 후 맨발로 도시 성벽을 돌면 여리고 전투처럼 도시가 함락될 것이라고 주장하여 십자군의 사기를 높였다.[60]
1099년 7월 8일, 십자군은 데시데리우스의 지시대로 행진을 하고 감람산에서 피터 더 허밋의 설교를 들었다.[64] 얼마 후, 이집트에서 파티마 구원군이 출발했다는 소식이 십자군에게 도시 재공격의 동기를 부여했다.[60]
1099년 7월 13일, 예루살렘에 대한 최종 공격이 시작되었다. 레이몽의 군대는 남문을, 다른 부대들은 북쪽 성벽을 공격했다. 7월 15일, 양쪽 끝에서 최종 돌격이 시작되어 북쪽 성벽의 내벽이 함락되었다. 혼란 속에서 수비병들은 성벽을 버리고 도망쳤고, 십자군은 마침내 도시에 진입했다.[65]
북쪽 성벽 공격 성공 후, 수비병들은 성전산으로 도망쳤고, 탕크레드와 그의 부하들이 추격했다. 탕크레드의 부하들은 수비병들보다 먼저 도착하여 많은 이들을 학살하고, 나머지는 알아크사 모스크에 피신했다. 탕크레드는 학살을 중단하고 모스크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호를 약속했다.[65] 남쪽 성벽의 수비병들은 북쪽 성벽 함락 소식을 듣고 성채로 도망쳤고, 레이몽과 프로방스 군이 도시에 진입했다. 주둔군 사령관 이프티카르 알-다울라는 레이몽과 협상하여 아스칼론으로 안전하게 통과하는 대가로 성채를 항복시켰다.[65]
학살은 그날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무슬림들은 무차별 학살되었고, 회당에 피신한 유대인들은 십자군에 의해 불타 죽었다. 다음 날, 탕크레드가 모스크에 가둔 포로들마저 학살되었다. 그러나 일부 무슬림과 유대인들은 도망치거나 몸값을 지불하고 살아남았다. 아스칼론 카라이파 장로들의 편지에 따르면, 아스칼론 유대인들은 포로들의 몸값을 지불하고 알렉산드리아로 안전하게 보내기 위해 노력했다. 도시의 동방 기독교인들은 총독에 의해 포위 공격 전에 추방되어 학살을 피했다.[65]
시민 학살이 일단락된 후, 십자군 지도자 고드프루아 드 부용은 "예루살렘 공작" 또는 "아드보카투스 산크티 세풀크리"(성묘의 수호자)라고 칭했다.
12. 예루살렘 왕국 성립
1099년 7월 22일, 성묘교회에서 예루살렘 통치를 결정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당시 그리스 정교회 총대주교가 사망하여 종교적 지도자가 부재한 상황이었다. 툴루즈의 레이몽은 1098년 최고의 십자군 지도자로 꼽혔으나, 아르카 포위 공격 실패와 왕국 건설 실패로 지지도가 낮아진 상태였다. 레이몽은 그리스도만이 쓸 수 있는 왕관을 거부했는데, 이는 경건함을 표방한 것일 수도, 다른 이들이 칭호를 거부하게 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 고드프루아는 이미 그러한 지위에 익숙했고, 아르덴-부용 가문의 봉신으로서 그와 그의 형제들(외스타슈, 보두앵)이 이끄는 로렌 군대의 존재는 그를 지도자로 선출하는 데 설득력을 더했다. 결국 고드프루아가 지도자로 선출되어 "성묘 수호자(Advocatus Sancti Sepulchri)"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에 분노한 레이몽은 도시를 떠나기 전 다윗의 탑을 장악하려 했다.[69]
예루살렘 왕국은 1291년까지 존속했지만, 예루살렘 도시는 1187년 핫틴 전투에서 살라딘에게 함락되었다. 예루살렘의 역사는 40년간의 무슬림 통치 이후, 여러 십자군 전쟁을 거쳐 다시 기독교 통치로 돌아오게 되었다.
13. 아스칼론 전투
1099년 8월, 파티마 왕조의 베지르 알-아프달 샤한샤는 2만 명의 북아프리카 군대를 이끌고 아스칼론에 상륙했다.[70] 고드프루아와 레이몽은 1,200명의 기사와 9,000명의 보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8월 9일 아스칼론 전투에서 이들과 맞섰다. 2대 1로 병력 수는 열세였지만, 십자군은 새벽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자신감에 차 있으면서 전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무슬림 군대를 격파했다. 그러나 레이몽과 고드프루아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십자군에게 항복하려던 도시 수비대의 시도가 무산되었다. 십자군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아스칼론은 여전히 무슬림의 손에 남아 신생 왕국에 대한 군사적 위협으로 남았다.
14. 여파와 유산
십자군 병사 대부분은 순례를 완료했다고 여기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을 방어하기 위해 남은 병력은 기사 300명, 보병 2,000명에 불과했다.[71] 고드프루아는 로렌 기사들의 지원 덕분에 르몽의 주장을 제치고 예루살렘의 지도자가 되었다. 1년 후 그가 사망하자, 로렌 기사들은 다고베르토 교황 특사가 예루살렘을 신권 정치 국가로 만들려는 계획을 막고, 예루살렘 왕으로 발두인을 추대했다. 보에몽은 유럽으로 돌아가 비잔티움 제국과 싸웠지만, 1108년 디라키움에서 패배했다. 르몽 사후, 그의 상속자들은 제노바의 지원을 받아 1109년 트리폴리를 점령했다.[72] 에데사 백작령과 안티오크 공국 사이의 관계는 변화무쌍했다. 1104년 하란 전투에서는 함께 싸웠지만, 안티오크는 종주권을 주장하며 발두인 2세의 귀환을 막았다. 프랑크족은 근동 정치에 깊이 개입했고, 무슬림과 기독교인들이 서로 싸우는 일이 잦았다. 안티오크의 영토 확장은 1119년 피의 들판(Ager Sanguinis)에서 튀르크 군에게 크게 패배하면서 끝났다.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전에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유럽을 떠나지 않은 사람들은 가족들에게 조롱과 비웃음을 당하고, 교황에게 파문 위협을 받았다.[71] 반면, 예루살렘에 도착한 생존자들은 서유럽에서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플랑드르의 로베르 2세는 그의 공적 덕분에 “예루살렘의”라는 별명을 얻었다. 1101년 십자군에는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전에 고향으로 돌아간 블루아의 스테판과 베르망두아의 위그도 있었다. 이 십자군은 소아시아에서 셀주크 투르크에게 거의 전멸당했지만, 생존자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왕국을 강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72]
1160년 이전 이슬람의 반응에 대한 기록은 제한적이지만, 십자군은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이는 튀르키인과 아랍인들이 십자군을 종교적 동기의 전사가 아니라, 비잔티움 용병들의 최신 버전으로 간주했기 때문일 수 있다. 또한 이슬람 세계는 카이로, 다마스쿠스, 알레포, 바그다드의 라이벌 통치자들 사이에 분열되어 있었다. 이슬람 전체의 반격은 없었고, 십자군은 이 기회를 이용해 세력을 굳힐 수 있었다.[141]
제1차 십자군은 예루살렘 왕국, 안티오키아 공국, 에데사 백국, 트리폴리 백국 등의 십자군 국가를 건설하고, 순례자 보호와 성묘 수호라는 종교적 목적을 달성했다. 제1차 십자군의 성공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지배층은 서유럽의 안정으로 인해 상실되었던 군사력을 부유한 동방으로 돌리고, 점령지에서 얻은 약탈품으로 원정군은 부를 얻을 수 있었다. 제노바 공화국과 베네치아 공화국 등 북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은 십자군 국가의 방위와 무역에서 큰 역할을 했다. 이들은 점령지와 무역을 하여 동서 무역(레반트 무역)으로 큰 이익을 얻었다.
예루살렘에서 서유럽으로 돌아온 병사들은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플랑드르의 로베르 2세는 예루살렘을 따서 "히에로솔뤼마타누스"라고 불렸다. 고드프루아 드 부이용의 일생은 사후 수년이 지나지 않아 전설이 되어 무훈시 등에 노래되었다. 한편, 십자군 병사들의 부재는 서유럽 정세에 변동을 가져왔다. 예를 들어, 노르망디 지방은 영주 로베르 카르투스(노르망디 공작 로베르)의 부재 중에 그의 동생 헨리 1세의 손에 넘어갔다. 귀환한 형은 동생과 다투어 1106년에는 탕슈브레 전투가 일어났다.
동로마 제국은 십자군 국가 건국으로 이슬람 국가들로부터의 압박은 없어졌지만, 십자군 국가와 대립하게 되었다.
정교회와 가톨릭의 화해가 십자군을 주창한 가톨릭 교회 지도자들의 초기 동기 중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양측의 틈은 십자군에 의해 심각해졌다. 양 교회는 교리상으로는 분열하면서도 명목상으로는 하나였고, 서로의 기존 권익을 존중하면서 완전한 결렬에는 이르지 않았지만, 십자군이 정교회의 예루살렘 총대주교를 축출하고 가톨릭의 총대주교를 임명함으로써 이 미묘한 관계는 무너지고 단절이 심화되었다. 이 긴장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철저히 약탈당한 제4차 십자군에서 정점에 달하게 된다.
이슬람 국가들은 여전히 내분을 멈추지 않고, 싸움에 십자군 국가를 이용하기 위해 이들과 동맹을 맺었다. 이후 이슬람 세력의 군대도 몇몇 전투에서 십자군을 물리쳤지만, 적극적인 반십자군을 계획하는 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슬람 국가가 서쪽의 기독교도를 축출하는 것은 12세기 중엽의 잔기 왕조의 누르 앗 딘과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딘의 시대가 된다.
15. 역사 서술
제1차 십자군은 중세 시대에 가장 많이 기록된 역사적 사건 중 하나였다.[73] 십자군 원정에 대한 역사 서술은 저자들의 견해와 그들이 살았던 시대를 반영한다.[74] 라틴 기독교 세계는 제1차 십자군 원정의 성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이에 대한 유일하게 신뢰할 만한 설명은 신의 섭리였다. 만약 십자군 원정이 실패했다면 십자군이라는 개념은 사라졌을 가능성이 높지만, 이러한 종교 전쟁은 수세기 동안 인기를 끌었다.[73]
이러한 역사 서술에 대한 비판적 분석은 조나단 라일리-스미스와 크리스토퍼 타이어먼의 연구에서 찾아볼 수 있다.[74] 당시에는 십자군이라는 명칭이 없었고, 단순히 "십자가를 단 자"라고 불렸다. "십자군"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제1차 십자군 원정 100년 후쯤이다. 그들은 성지를 탈환한다는 명분 외에도, 속죄(죄의 대가의 면제)를 구하며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순례자"(페레그리나토레스)라는 의미도 있었다.
15. 1. 원전 자료
제1차 십자군에 대한 라틴어 원전 자료는 다양하다. 익명의 『프랑크인의 업적(Gesta Francorum)』은 십자군에 참여한 사람이 쓴 기초적인 자료로 평가받는다. 페터 투데보데의 『예루살렘 원정기』, 몬테 카시노 연대기 『성전의 역사』는 『프랑크인의 업적』을 활용했다. 라몽 드 아귀이에의 『예루살렘을 점령한 프랑크인들의 역사』, 풀셰르 드 샤르트르의 『예루살렘 순례 프랑크인들의 업적』도 『프랑크인의 업적』을 활용했지만, 독자적인 내용도 담고 있다. 알베르 드 아헨의 『예루살렘 원정의 역사』는 다른 목격자들의 보고서에 의존하여 『프랑크인의 업적』과는 독립적으로 쓰여졌다.[78]기베르 드 누장, 발드릭 드 돌, 로베르 수도사는 『프랑크인의 업적』을 개작했는데, 로베르 수도사의 작품이 가장 널리 읽혔다.[78]
비잔티움 제국의 공주 안나 콤네나의 『알렉시아스』는 그리스인의 관점을 제시한다.[78]
이슬람 관점에서는 이븐 알-칼라니시의 『다마스쿠스 연대기』와 알리 이븐 알-아티르의 『완전한 역사』가 주요 자료이다. 아르메니아와 시리아어 자료로는 마테오 데 에데사의 『연대기』와 미카엘 시리아인의 『연대기』가 있다.[80]
15. 2. 18세기까지의 후대 저작
라틴 기독교 세계는 제1차 십자군 원정의 성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그에 대한 유일하게 신뢰할 만한 설명은 신의 섭리였다. 만약 십자군 원정이 실패했다면 십자군이라는 패러다임은 버려졌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러한 종교 전쟁은 수세기 동안 인기를 끌었고, 십자군 원정 자체는 중세 시대 가장 많이 기록된 역사적 사건 중 하나가 되었다.[73] 제1차 십자군과 십자군 원정 전반에 대한 역사서술(역사의 역사)은 예상대로 저자들의 견해와 그들이 살았던 시대를 반영하는 작품들을 보여준다.[74]티레의 빌헬름의 『해외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역사(Historia rerum in partibus transmarinis gestarum)』는 제1차 십자군 역사의 주요 1차 사료이며, 최초의 분석적 역사로 여겨진다. 17세기까지의 후대 역사서는 그의 저술에 크게 의존했다. 이러한 역사서들은 1차 사료를 사용했지만, 성전(bellum sacrum)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선택적으로 사용했으며, 저명한 인물들과 전투, 그리고 고위 정치의 음모에 중점을 두었다.[97]
"십자군(crusades)"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17세기 프랑스 예수회 사제이자 역사가인 루이 메임부르[98]였으며, 그의 『성지를 해방하기 위한 십자군 전쟁의 역사(Histoire des Croisades pour la délivrance de la Terre Sainte)』[99]는 1195년부터 1220년까지의 십자군 전쟁에 대한 대중적이고 왕당파적인 역사서이다.
18세기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는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가 셀주크 제국의 부상부터 1195년까지의 십자군 전쟁의 역사를 다룬 『십자군 전쟁의 역사(Histoire des Croisades)』[102]가 있다. 스코틀랜드의 철학자이자 역사가인 데이비드 흄은 제1차 십자군에 대해 직접적으로 쓰지는 않았지만, 그의 『잉글랜드 역사(The History of England)]』[103]에서는 십자군 전쟁을
15. 3. 19세기와 20세기
19세기 프랑스의 조제프 프랑수아 미쇼는 1808년부터 1822년까지 『십자군 원정사』(Histoire des Croisades)를 출판하여 십자군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104] 영국의 찰스 밀스는 1820년에 『성지를 탈환하고 소유하기 위한 십자군 원정사』(History of the Crusades for the Recovery and Possession of the Holy Land)를 집필하여 십자군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높였다.[104] 하인리히 폰 지벨은 티레의 빌헬름의 저술을 비판하고, 제1차 십자군 원정의 주요 사료들을 분석하는 등 십자군 연구에 학문적인 엄밀성을 더했다.[86] 라인홀트 뢰히리히트는 1898년에 『제1차 십자군 원정사』(Geschichte des ersten Kreuzzuges)를, 1901년에는 『예루살렘 왕국사』(Geschichte des Königreichs Jerusalem)를 저술하여 십자군 시대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104]20세기에는 르네 그루세가 1934년부터 1936년까지 『십자군 원정사』(Histoire des Croisades)를 출판하여 프랑스 중심의 십자군 서술을 제시했다.[104] 스티븐 런시먼은 1951년부터 1954년까지 『십자군 원정사』(A History of the Crusades)를 통해 방대한 분량의 십자군 역사를 서술하며 십자군 연구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저서를 남겼다.[104] 케네스 세튼은 1955년부터 1989년까지 『십자군 원정사』(A History of the Crusades)를 편집하여 십자군 연구의 다양한 분야를 집대성하고 학문적 발전에 기여했다.[104]
15. 4. 현대의 제1차 십자군 역사
현대 역사학에서 제1차 십자군 연구는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조너선 라일리-스미스, 캐롤 힐렌브랜드, 크리스토퍼 타이어먼, 토마스 애즈브리지, 토머스 F. 매든 등 여러 학자들이 십자군 연구에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 앨런 V. 머레이가 편집한 『십자군 운동 백과사전』은 십자군 운동을 종합적으로 다루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7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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